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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성(神性)

하나님의 속성(屬性) 즉, 원상(原相)에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꼴의 측면뿐만 아니라 기능, 성질, 능력의 측면도 있다. 이것이 신성(神性)이다. 종래의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전지(全知), 전능(全能), 편재성(遍在性), 지선(至善), 지진(至眞), 지미(至美), 공의(公義), 사랑, 창조주(創造主), 심판주(審判主), 로고스 등은 그대로가 신성(神性)에 관한 개념들이며 통일사상도 물론 이러한 개념(槪念)들을 신성(神性)의 표현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문제의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개념(槪念)들은 꼴(신상)의 측면을 함께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이러한 개념(槪念)들은 꼴(신상)의 측면을 함께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창조와 직접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대로는 현실문제 해결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통일사상은 현실문제 해결에 직접 관련되는 신성(神性)으로서 심정(心情), 로고스, 창조성(創造性)의 세 가지를 꼽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심정(心情)이 가장 중요하며, 이것은 이때까지 어느 종교도 다루지 않았던 신성(神性)이다. 다음에 이들의 신성의 개념을 설명하고 그것이 어떻게 현실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1) 심정(心情)

1) 심정(心情)이란 무엇인가?

심정(心情)은 하나님의 속성 특히 성상(性相)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서,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衝動)이다. 심정의 이와 같은 개념(槪念)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의 경우를 例로 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인간은 누구나 생래적(生來的ː태어나면서부터)으로 기쁨을 추구한다. 즉 기뻐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이것은 인간이 언제나 기쁨을 얻고자 하는 충동(衝動), 또는 기쁘고자 하는 충동(衝動)을 갖고 살고 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 대부분의 인간들은 참 기쁨, 영원한 기쁨을 얻지 못하고 있음도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대부분 기쁨을 금전이나 권력, 지위나 학식속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참된 기쁨, 영원한 기쁨은 사랑(참사랑)의 생활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사랑의 생활이란 남을 위해서 사는 생활, 애타적(愛他的)인 봉사생활, 즉 남에게 온정을 베풀어서 남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생활을 말한다.

2) 심정(心情)은 정적 충동(情的衝動)이다.

여기서 정적(情的)인 충동(衝動)에 대해서 설명한다. 정적인 충동이란, 내부로부터 솟아오르는 억제(抑制)하기 어려운 소원 또는 욕망을 뜻한다. 보통의 소원이나 욕망은 의지(意志)로써 억제할 수 있으나, 정적(情的)인 충동은 인간의 의지로써 억제할 수 없는 원망(願望)이요, 욕망(欲望)이다.

우리들은 기쁘고자 하는 충동이 이와 같이 억제하기 어려운 것임을 일상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인간이 돈을 벌려 하고, 지위를 얻으려 하고, 학식을 넓히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도 기쁘고자 하는 충동때문이요, 어린 아이들이 무엇이든지 호기심(好奇心)을 가지고,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것도 기쁘고자 하는 충동때문이요, 심지어 범죄행위(犯罪行爲)마저도 다만 방향이 그릇되었을 뿐, 그 동기는 역시 기쁘고자 하는 충동인 것이다.

이와 같이 기쁘고자 하는 충동은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욕망은 달성되어야만 충족(充足)이 된다. 대부분의 인간들에 있어서 기쁘고자 하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고 있는 것은 기쁨이 사랑을 통해서만 얻어짐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쁨이 사랑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은 그 기쁨의 근거(根據)가 하나님에 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심정(心情)이시다.

하나님은 심정(心情) 즉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을 지니고 있는 바, 이같은 하나님의 충동은 인간에 있어서의 충동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억제(抑制)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인간은 닮기의 법칙에 따라서 이같은 하나님의 심정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비록 타락(墮落)하여 사랑은 상실(喪失)되었지만 기쁘고자 하는 충동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정적(情的)인 충동을 억제하기란 어렵다는 것이 밝혀졌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하나님에 있어서 이 기쁘고자 하는 정적인 충동은, 사랑하고자 하는 충동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다. 즉 참 기쁨은 참사랑을 통해서만 얻어지기 때문에, 사랑하고자 하는 충동이 기쁘고자 하는 충동보다 더 강력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충동은, 사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욕망(欲望)을 뜻하게 된다. 사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함은 사랑의 대상을 갖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음을 또한 뜻한다.

이러한 사랑의 충동에 의해서 기쁘고자 하는 충동이 촉발(觸發)된다. 따라서 사랑의 충동이 1차적인 것이요, 기쁨의 충동은 2차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기쁨을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며, 다만 무조건적인 충동일 뿐이다. 그 사랑의 필연적(必然的)인 결과가 기쁨이다. 따라서 사랑과 기쁨은 표리(表裏; 겉과 속)관계에 있으며, 기쁘고자 하는 충동도 실은 사랑하고자 하는 충동이 표면화(表面化)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정(心情)은 한없이 사랑하고 싶은 정적(情的)인 충동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에는 반드시 그 사랑의 대상이 필요하다. 더욱이 하나님의 사랑은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이기 때문에, 그 사랑의 대상이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창조는 필연적(必然的), 불가피적(不可避的)이었으며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4) 우주(宇宙) 창조(創造)와 심정(心情)

이와 같이 심정(心情)이 동기가 되어, 사랑의 대상으로서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직접적(直接的)인 사랑의 대상으로, 만물은 하나님의 간접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만물이 간접적인 대상이라 함은, 직접적으로는 만물이 인간의 사랑의 대상임을 뜻한다. 그리고 창조의 동기로 볼 때의 인간과 만물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지만, 결과로 볼 때의 인간이나 만물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심정(心情)이 동기가 된 우주 창조의 이론 즉 창조의 심정동기설(心情動機說)은 또 하나의 현실문제[창조설(創造說)이 참이냐, 생성설(生成說)이 참이냐의 문제]를 해결한 결과가 되었다. 즉 우주의 발생에 관한 종래의 창조설과 생성설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결과가 된 것이다. 그것은 생성설〔예:플로티노스의 유출설(流出說), 헤겔의 절대정신의 자기전개설(自己展開說), 가모브(Gamov)의 대폭발(Big Bang)설, 유교의 천생만물설(天生萬物說) 등〕로서는 현실의 죄악이나 혼란 등의 부정적 측면까지도 자연발생에 의한 것으로 다루어져서 해결할 길이 막혀 있었으나, 정확한 창조설(創造說)로서는 그러한 부정적 측면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심정(心情)과 문화

다음은 심정(心情)이 하나님의 성상의 핵심이라는 명제가 의미하는 또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심정과 문화의 관계에 관한 설명이다.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은 내적 성상과 내적 형상으로 되어있는 바, 내적 성상이 내적 형상보다 더 내적이며, 심정은 그 내적 성상보다도 더 내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창조 본연의 인간의 성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이것을 圖表로 나타내면 그림 1-5와 같다.

그림 1-5. 심정(心情)을 중심으로 한 성상(性相)과 형상(形狀)...
그림 1-5. 심정(心情)을 중심으로 한 성상(性相)과 형상(形狀)

이 사실은 심정(心情)이 인간의 지적 활동(知的活動), 정적 활동(情的活動), 의적 활동(意的活動)의 원동력이 됨을 뜻한다. 심정은 정적인 충동력으로서 이 충동력이 지적 기능, 정적 기능, 의적 기능을 부단히 자극하여 나타나는 활동이 바로 지적 활동, 정적 활동, 의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적 활동(知的活動)에 의해서 철학, 과학을 위시한 여러 학문분야가 발달하게 되고, 정적 활동(情的活動)에 의해서 회화(繪畵), 음악(音樂), 조각(彫刻), 건축(建築) 등의 예술분야가 발달하게 되고, 의적 활동(意的活動)에 의해서 종교, 윤리, 도덕, 교육 등의 규범분야(規範分野; 當爲의 分野)가 발달하게 된다.

따라서 창조본연의 인간들로 구성되는 사회에 있어서는 지적 활동(知的活動), 정적 활동(情的活動), 의적 활동(意的活動)의 원동력이 심정이요, 사랑이기 때문에 학문도 예술도 규범도 모두 심정이 그 동기가 되고 사랑의 실현이 그 목표가 된다. 그런데 학문분야, 예술분야, 규범분야의 총화(總和) 즉 인간의 지적 활동(知的活動), 정적 활동(情的活動), 의적 활동(意的活動)의 성과의 총화가 바로 문화(文化) · 문명(文明)인 것이다.

따라서 창조본연의 문화는 심정을 동기로 하여 사랑의 실현(實踐)을 목표로 하고 성립하며, 이러한 문화는 영원히 계속된다. 이러한 문화를 통일사상은 심정문화(心情文化), 사랑의 문화 또는 중화문화(中和文化)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간 조상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인류문화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측면을 지닌 비원리적(非原理的)인 문화로서, 흥망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성상의 핵심인 심정이 이기심(利己心)에 의해서 가려져 버렸기 때문이며, 따라서 심정(心情)의 충동력이 이기심을 위한 충동력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혼란(混亂)이 거듭되는 문화를 바로잡는 길은, 이기심을 추방하고 성상의 핵심의 자리에 심정의 충동력을 다시 활성화(活性化)시킴으로써, 전문화분야를 심정을 동기로 하고 사랑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문화영역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즉 심정문화(心情文化), 사랑의 문화를 창건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심정(心情)은 하나님의 성상의 핵심(核心)이라는 명제가, 오늘날의 위기(危機)에서 문화를 어떻게 구출할 것인가 하는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됨을 뜻하는 것이다.

6) 심정(心情)과 원력(原力)

끝으로 심정(心情)과 원력(原力)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우주 만물은 일단 창조된 뒤에도 부단히 하나님으로부터 일정한 힘을 받고있다. 피조물(被造物)은 이 힘을 받아 가지고 개체간에도 힘을 주고 받는다. 따라서 전자(前者)는 종적(縱的)인 힘이요, 후자(後者)는 횡적(橫的)인 힘이다. 통일사상은 전자를 원력(原力)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만유원력(萬有原力)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원력(原力)도 실은 원상내의 수수작용(授受作用), 즉 성상과 형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형성된 신생체(新生體)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상내의 심정(心情)의 충동력과 형상내의 전에너지(Pre-Energy)와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형성된 새로운 힘이 원력(原力; Prime Force)이다. 이것이 만물에 작용하여 횡적(橫的)인 만유원력(萬有原力)(Universal Prime Force)으로 나타나면 만물(萬物, 자연) 상호간의 수수작용을 일으킨다. 따라서 만유원력(萬有原力)은 하나님의 원력의 연장인 것이다.

만유원력(萬有原力)이란, 물리학에서 말하는 만유인력(萬有引力)에 해당하는 개념(槪念)인 바, 만유원력이 심정(心情)의 충동력과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에 의해서 형성된 원력의 연장이란 말은, 우주내의 만물 상호간에 물리학적인 힘 뿐아니라, 사랑의 힘도 작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이 아니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천도(天道)인 것이다.

이리하여 심정(心情)과 원력(原力)과의 관계에 관한 이론도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됨을 알게 된다. 즉 인간은 남을 반드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때에 따라서는 투쟁(폭력)이 필요할 때도 있지 않는가, 적을 사랑할 것인가, 타도(打倒)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 이 이론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상으로 심정(心情)에 관한 설명을 전부 마친다. 다음은 로고스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2) 로고스

1) 로고스란 무엇인가

로고스(Logos)란, 統一原理에 의하면 말씀 또는 이법(理法)을 뜻한다(원리강론, 1987, p. 222).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 1:1~3)

통일사상에서 보면, 로고스를 말씀이라고 할 때의 그 말씀은, 하나님의 사고(思考), 구상(構想), 계획(計劃)을 뜻하며, 또 로고스를 이법(理法)이라고 할 때의 그 이법은 이성(理性)과 법칙(法則)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의 이성은 본성상 내의 내적 성상의 지적 기능(知的機能)에 속하는 이성을 뜻함은 물론이지만, 만물을 창조한 로고스의 일부인 이성은 인간의 이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의 이성은 자유성을 지닌 지적 능력(知的能力)인 동시에 개념화(槪念化)의 능력 또는 보편적 진리 추구의 능력이지만, 로고스內의 이성은 단순한 자유성, 사고력, 지적 능력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로고스의 또 하나의 측면인 법칙은 자유성이나 목적성이 배제된 순수한 기능성(機械性), 필연성(必然性)만을 지닌 규칙을 뜻함은 물론이다. 즉 때와 장소를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나타나는 규칙적인 현상이 법칙이다. 마치 기계장치인 시계의 시침(時針)이나 분침(分針)이,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일치하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것이 법칙의 규칙성(規則性), 기능성(機械性)인 것이다.

2) 로고스는 이법(理法)이다.

이법(理法)이란, 이러한 이성과 법칙(法則)의 통일을 뜻한다. 이리하여 여기서는 이러한 이법으로서의 로고스를 주로 다루려고 한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 로고스에서 또 하나의 현실문제의 해결의 기준을 찾아 세우기 위해서이다. 그 현실문제란, 오늘날 사회의 대혼란(大混亂)의 원인이 되고 있는 가치관(價値觀)의 붕괴를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원리강론에는 로고스가 하나님의 대상인 동시에 이성성상을 지닌 것(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다(원리강론, 1966, p. 229. 同 1987, p. 222). 이것은 로고스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일종의 피조물이며 신생체임을 뜻하는 것으로서, 성상과 형상의 합성체(合性體)와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상(構想)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말씀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로고스 그 자체가 만물과 똑같은 피조물일 수는 없다. 실제의 피조물이 아니면서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하나님의 대상은 사고(思考)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즉 그것은 완성(完成)된 구상(構想)을 뜻하는 것이며, 마음[본성상(本性相)]에 그려진 일종의 설계도인 것이다. 건물을 세울 때 먼저 그 건물에 대한 상세한 설계도를 작성하듯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함에 있어서도 만물 하나 하나의 창조에 관한 구체적인 청사진(靑寫眞) 또는 계획안(計劃案)이 먼저 세워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고스이다.

그런데 설계도는 비록 건물은 아닐지라도, 설계도 그 자체는 제작물(製作物) 즉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로고스도 구상(構想)이요 설계도인 이상 그것 역시 결과물이며 따라서 신생체요 일종의 피조물(被造物)인 것이다. 피조물은 모두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서 존재한다. 그러면 신생체로서의 로고스는 하나님의 무엇을 닮았을 것인가? 그것이 바로 본성상(本性相)안의 내적 성상(內的性相)과 내적 형상(內的形狀)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내적 성상(內的性相)과 내적 형상(內的形狀)이 일정한 목적을 중심하고 통일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로고스의 이성성상인 것이다. 마치 하나님에 있어서, 본성상과 본형상이 중화(中和)를 이룬 상태가 신상인 것과 같다. 그런데 로고스는 말씀인 동시에 이법(理法)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로고스를 이법(理法)으로만 이해할 때 로고스의 이성성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이 바로 이성과 법칙(法則)이다. 따라서 이성과 법칙의 관계는 바로 내적 성상과 내적 형상의 관계와 같다. 그런데 내적 성상과 내적 형상의 상호관계는 후술(後述)하는 바와 같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성과 법칙(法則)의 관계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인 것이다.

3) 로고스는 이성과 법칙(法則)의 통일체(統一體)

이와 같은 이성(理性)과 법칙(法則)의 통일로서의 로고스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피조물에는 모두 이성적요소(理性的要素)와 법칙적요소(法則的要素)가 통일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그리하여 만물이 존재하거나 운동함에 있어서 반드시 이 양자가 통일적으로 작용한다. 단 저차원의 만물일수록 법칙적인 요소가 더 많이 작용하고, 고차원의 만물 일수록 이성적인 요소가 더 많이 작용한다.

그리하여 가장 저차원인 광물에는 법칙적 요소만이 작용하고 이성적 요소는 전연 없는 것 같고, 가장 고차원인 인간에는 이성적 요소만이 작용하고 법칙적요소는 전연 없는 것 같지만, 양자의 모두에 이성적 요소(理性的要素) 및 법칙(法則的 요소(要素)가 함께 통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만물의 존재와 운동은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이며, 목적성(目的性)과 기능성(機械性)의 통일인 것이다. 즉 필연성속에 자유성이 작용하고, 기능성속에 목적성이 작용한다. 필연(必然)과 자유의 관계가 종래에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의 관계인 것처럼 이해되어 왔다. 그것은 마치 구속(拘束) 과 해방(解放)이 정반대의 개념인 것처럼, 필연과 자유도 정반대의 개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사상은 로고스의 개념(槪念)에 관한 한, 이성과 법칙을 이율배반(二律背反)의 관계로 보지 않고 도리어 통일의 관계로 본다. 이것은 비유컨대 기차가 레일(rail) 위를 달리는 현상과 같다할 것이다. 기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법칙(法則)이며, 만일 그 레일을 벗어나면 기차 자체의 파괴뿐 아니라 인근(隣近)의 인명이나 건물에 피해를 준다. 기차는 반드시 레일 위만을 달려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차의 운행은 준법적인 것이며, 따라서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레일 위를 달린다 하더라도, 빨리 달리고 천천히 달리는 것은 기관차(기관사)의 자유이다. 따라서 기차의 운행은 전적으로 필연적(必然的)인 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인 것이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들어 보자. 교통신호를 지키는 자동차 운전자의 예가 그것이다. 운전자는 청신호 때에는 전진하고, 적신호 때에는 정지한다. 이것은 교통법규로서 누구나 지켜야 할 필연성이다. 그러나 일단 청신호가 켜진 뒤에는 교통안전에 지장이 되지 않는 한 속도는 자유로이 조정할 수가 있다. 따라서 자동차 운전도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이다.

이상(以上)으로 기차의 운행이나 자동차의 운전에 있어서 필연성과 자유성의 관계가 통일의 관계임을 밝혔는데, 로고스에 있어서의 이성과 법칙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통일의 관계이다. 이로써 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서의 이성과 법칙은 이율배반(二律背反)이 아니라 통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로고스가 이성과 법칙의 통일이기 때문에 로고스에 의해서 창조된 만물은 크게는 천체(天體)로부터 작게는 원자(原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예외없이 이성과 법칙의 통일적 존재이다. 즉 만물은 반드시 그 내부에 이성과 법칙, 자유성과 필연성, 목적성과 기계성의 통일에 의해서 존재하고 운동하고 발전한다.

이 사실은 오늘날의 일부 과학자의 이론과도 일치한다. 예컨대 검류계(檢流計; 폴리그라프)의 부착실험에 의한 식물심리의 확인(Backster 效果)과 샤론(Geun E. Charon)博士의 복합상대론(複素相對論; Complex Relativity)에 있어서의 전자(電子), 광자(光子)內의 기억과 사고의 메카니즘의 확인 등이 그것이다. 즉 식물에 마음이 있고, 전자에 사고(思考)의 메카니즘이 있다는 사실은 모든 피조물 속에 이성과 법칙, 자유성과 필연성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4) 로고스 및 자유와 방종

다음은 로고스와 관련해서 자유와 방종의 참 뜻을 밝히고자 한다. 자유와 방종에 관한 바른 인식(認識)에 의해서 또 하나의 현실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의 이름 밑에 자행되는 갖가지의 질서파괴(秩序破壞) 행위와 이에 따르는 사회혼란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와 방종(放縱)의 참 뜻이 밝혀져야 한다.

原理(원리강론)에는 원리를 벗어난 자유는 없으며(1987, p. 103), 책임없는 자유는 없으며(同上), 실적없는 자유는 없다(同上)라고 적혀 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자유의 조건은 원리 안에 있을 것, 책임을 질 것, 실적을 올릴 것의 세 가지가 된다. 여기서 원리를 벗어난다는 것은 原則 즉 법칙을 벗어난다는 뜻이며, 책임이란 각자의 책임분담 완수를 뜻하는 동시에 창조목적의 완성을 의미하며, 실적이란 창조목적을 완성하여 선의 결과를 가져옴을 뜻한다. 그런데 책임분담의 완수나 창조목적의 완성이나 선(善)의 결과를 가져옴은 모두 넓은 의미의 원리요, 인간이 따라야 하는 천도(天道)이며, 법칙(法則; 가치법칙, 규범법칙)이다.

따라서 자유에 관한 세 가지 요건 즉 '원리 안에 있을 것', '책임을 질 것', '실적을 올릴 것' 등은 한마디로 '자유는 원리안에서의 자유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참 자유는 결국 법칙성(法則性), 필연성(必然性)과의 통일에 있어서만 성립한다는 결론이 된다. 여기서 법칙이란, 자연에 있어서는 자연법칙이요, 인간생활에 있어서는 가치법칙(규범법칙)이다. 가치니 규범이니 하는 것은 질서 하에서만 성립된다. 규범을 무시하거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는, 본연의 세계에서는 결코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엄격한 의미에서 선택(選擇)의 자유이며, 이 선택은 이성에 의한 선택이다. 따라서 자유는 이성에서 출발하여 실천으로 옮겨진다. 이때 자유를 실천하려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이 자유의지이며, 이 의지(意志)에 의해서 자유가 일단 실천되면 그 실천행위가 자유행동이 된다. 이것이 원리강론에 보이는 자유의지, 자유행동 등의 개념(槪念)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의 자유에 의한 선택이나, 자유의지나, 자유행동은 모두 자의적(恣意的)인 것이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원리 안에서 즉 법칙(法則)과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필연성과 통일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본래 자유는 이성의 자유이며, 이성은 법칙과의 통일하에서만 작용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연의 자유는 '이법(理法)' 즉 '로고스'안에서만 성립할 수 있으며, 로고스를 떠난 자유는 존립(存立)할 수 없다. 흔히 법칙은 자유를 구속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법칙과 자유의 원리적인 의미를 모르는 데서 오는 착각인 것이다. 본연의 법칙이나 자유는 모두 사랑의 실현을 위한 것이며, 사랑 안에서의 법칙이며 자유이다. 참사랑은 생명(生命)과 기쁨의 원천(源泉)이다. 따라서 본연의 세계에서는 기쁨 속에서 법칙을 따라서 자유를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로고스가 심정(心情)을 터로 하고 형성(形成)되기 때문이다.

로고스를 떠난 자의적(恣意的) 사고(思考)나 자의적 행동은 사이비(似而非) 자유로서 이것이 바로 방종(放縱)이다. 따라서 자유와 방종은 그 뜻이 전연 다르다. 자유는 선(善)의 결과를 가져오는 건설적인 개념(槪念)이지만, 방종은 악(惡)의 결과를 가져오는 파괴적(破壞的)인 개념이다. 이와 같이 자유와 방종은 엄격히 구별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혼동되거나 착각되고 있다. 이것은 자유의 참 근거(根據)로서의 로고스에 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로고스의 뜻을 바르게만 이해한다면 자유의 참 뜻을 알게 되고, 따라서 자유라는 이름 하의 온갖 방종이 방지(防止)될 수 있으며, 마침내는 사회혼란의 수습도 가능해 질 것이다. 이것으로 로고스에 관한 이론도 현실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밝혔다.

5) 로고스 및 심정(心情)과 사랑

마지막으로 로고스와 심정 및 사랑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로고스는 말씀, 구상(構想)인 동시에 이법(理法)이었다. 그런데 말씀(構想)과 이법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말씀 속에 그 말씀의 일부로서 이법(理法)이 포함되어 있다. 마치 생물을 다루는 생물학 속에 그 일분과로서, 생물의 생리학(生理學)이 포함되어 있는 것과 같다. 생물학에는 해부학(解剖學), 생화학(生化學), 생태학(生態學), 발생학(發生學), 분석학(分析學), 생리학(生理學) 등 여러 분과로 분류되지만 그 중의 일분과(一分科)가 생리학인 것처럼,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무한대한 양과 종류를 내용으로 하는 말씀 중의 적은 일부분이 이법(理法)(로고스)으로서, 말씀중의 만물의 상호작용(相互作用) 또는 상호관계(相互關係)의 기준에 관한 부분인 것이다. 따라서 말씀과 이법(理法)은 별개의 것이 결코 아닐 뿐 아니라, 말씀의 터전이 되고 있는 심정은 동시에 이법(理法), 로고스의 터전도 되는 것이다. 마치 유기체(有機體)의 생활현상의 연구가 생물학의 모든 분과의 공통항목인 것처럼,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정(心情)이 구상과 이법의 공통기반이 되고 있다.

심정(心情)은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이었다. 이와 같은 심정이 창조에 있어서 구상과 이법의 터전이 되고 있다는 것은 피조물 전체의 구조(構造), 존재(存在), 변화(變化), 발전(發展) 등 모든 우주현상이 사랑의 충동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법(理法)도 자연법칙이건 가치법칙이건 간에 그 배후에 사랑이 반드시 작용하고 있고 또 작용해야 한다. 자연법칙은 일반적으로 물리화학적(物理化學的) 법칙(法則)으로만 이해되고 있는데 이것은 불완전한 이해이며 비록 차원은 다를망정 거기에 반드시 사랑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상호간의 가치법칙(價値法則), 규범법칙(規範法則)에는 이 사랑이 더욱 더 현저하게 작용해야 할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앞에서 로고스 즉 이법의 해설에 있어서 이성과 법칙(法則), 따라서 자유성과 필연성에 관해서만 주로 다루었지만, 이법의 작용에 있어서는 이법 그 자체 못지않게 사랑이 중요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중요도에 있어서 사랑은 이법을 능가하기조차 하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이법(理法)만의 생활은 규율(規律) 속에서만 사는 병영(兵營)처럼 냉랭해지기 쉽고, 알맹이 없는 쭉정이처럼 시들기 쉬운 것이다. 따뜻한 사랑 속에 지켜지는 이법의 생활에서만 비로소 백화가 만발하고, 봉접(蜂蝶; 벌과 나비) 이 군무(群舞; 무리지어 춤추는)하는 봄동산의 평화가 찾아드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정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참된 방안(方案)이 무엇인가 하는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基準)이 된다. 즉 심정을 터전으로 하는 로고스[이법(理法)]의 이론은 가정에의 참된 평화 수립의 방안(方案)도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로고스에 관한 설명을 모두 마치고 다음은 창조성(創造性)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3) 창조성(創造性)

1) 창조성(創造性)이란 무엇인가

창조성은 일반적으로 새 것을 만드는 성질(性質)이라고 정의(定義)되고 있다. 통일원리에서도 창조성을 일반적인 뜻으로도 해석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창조의 능력(能力)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원리강론에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能力)과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처럼 창조의 성질이나 창조의 능력(能力)으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정확한 이해라 할 수 없다. 이미 여러 번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는 목적은 현실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모든 이해(理解)가 정확하고 구체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창조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창조에 관한 상식적인 이해만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창조의 특성(特性) 또는 요건(要件)이 밝혀질 필요가 있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발적(偶發的)인 것이 아니며, 자연발생적인 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억제불능(抑制不能)의 필연적 동기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명백한 합목적적인 의도(意圖)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창조가 이른바 심정(心情)을 동기(動機)로 한 창조심정동기설(心情動機說)로서 이 창조에는 창조목적을 중심한 내적 및 외적인 사위기대(四位基臺) 또는 수수작용(授受作用)이 반드시 형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구체적으로는 목적을 중심한 내적 및 외적인 사위기대 형성의 능력으로 정의(定義)하게 된다. 이것을 인간의 창조(新品目의 製造)의 경우를 비유해서 설명한다면, 내적 사위기대의 형성은 구상(構想)하는 것, 또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개발(따라서 청사진(靑寫眞)의 작성)을 뜻하며, 외적 사위기대의 형성은 그 청사진에 따라서 인간(主體)이 기계와 원료(對象)를 적절히 사용(수수작용)해서, 청사진대로의 신제품[신생체(新生體)]을 만들어 냄을 뜻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속성(屬性)에 있어서 주체와 대상은 각각 성상과 형상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있어서 내적 사위기대의 형성은 상기(上記)한 목적중심의 로고스를 형성하는 것이며, 외적 사위기대의 형성은 목적 중심한 성상(性相)(주체)과 형상(形狀)(대상)이 수수작용을 하여 신생체(만물)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은 이와 같은 내용을 갖춘 내적 및 외적 사위기대 형성의 능력으로서,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로고스 형성에 이어서 신생체를 형성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이다. 하나님의 창조성의 개념(槪念)을 이처럼 상세히 다루는 것은 창조와 관련된 여러 가지의 현실적 문제, 예컨대 공해문제(公害問題), 군비제한(軍備制限) 내지 철폐문제(撤廢問題), 과학과 예술의 방향성(方向性) 문제 등의 해결의 근본적 기준을 정립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2) 인간의 창조성(創造性)

다음은 인간의 창조성에 관하여 설명코자 한다. 인간에게도 새것을 만드는 능력(能力), 즉 창조성(創造性)이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성이 닮기의 법칙에 따라서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다. 그런데 원래 인간은 닮기의 법칙(法則)에 의해서 지은 바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창조성도 하나님의 창조성을 완전히 닮기로, 또는 이어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불완전하게밖에 닮지 못하였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사실상 인간의 창조성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완전히 닮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창조성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성을 인간에게 부여(賦與)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자신의 창조성을 부여하시고자 하였을까?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세계(萬物世界)에 대한 창조주의 입장에 서게 하여서, 만물에 대한 주관(主管) 자격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여기서 만물주관이란 만물을 아끼고 소중히 하면서, 그 만물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사랑의 마음을 갖고 여러 가지의 사물을 다루는 것을 만물주관(萬物主管)이라 하며, 여기에는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領域)이 포함된다. 예컨대 경제, 산업, 과학, 예술 등이 모두 만물주관의 개념에 포함된다. 지상의 인간은 육신을 쓰고 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물질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인간생활 전체가 만물주관의 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본연(本然)의 만물주관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어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본연의 주관(主管)이란 사랑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사물을 다루는 것을 말한다. 즉 사랑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행하는 행위, 예컨대 경작, 제작, 생산, 개조, 건설, 발명, 보관, 운송, 저장, 예술창작 등의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경제, 산업, 과학, 예술 등의 활동 뿐 아니라 심지어 종교생활, 정치생활도 그것이 사랑을 가지고 물건을 다루는 한에 있어서 본연의 만물주관에 포함된다. 이와 같은 본연의 인간에 있어서 사물을 다루는 데는, 사랑과 함께 새로운 구상(構想)이 부단히 요구되기 때문에, 본연의 주관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성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창조성을 인간은 타락하지 않았다면 완전히 닮을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본연의 만물주관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 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으며, 따라서 이러한 인간이 이어받은 창조성은 불완전한 것이 되어버렸으며, 만물주관도 불완전하고 비원리적(非原理的)인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는지 모른다. 즉 하나님이 닮기의 법칙에 의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날 때부터 본연의 창조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타락과는 관계없이 그 창조성은 지속되었을 것 아닌가? 실지로 오늘날 과학기술자들은 훌륭한 창조(創造)의 능력, 즉 창조성을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의문이다.

3) 닮기의 창조(創造)

여기서 잠깐 닮기의 창조(創造)가 시공(時空)의 세계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창조란 요컨대 피조물 즉 하나 하나의 만물이, 시공의 세계을 포함한 4차원의 세계에 출현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창조가 하나님의 구상(構想)의 단계에서는 초시간(超時間), 초공간(超空間的)으로 이루어졌더라도, 그 피조물이 시공세계에 출현하는데 있어서는 소형(小形), 미숙(未熟) 또는 유소(幼少)의 단계에서부터 출발하여, 일정한 시간적 경과를 거쳐서 일정한 크기까지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일정한 크기의 단계에까지 완성한 후에야 하나님의 구상(構想) 또는 속성(屬性)을 완전히 닮게 된다. 그때까지의 기간은 미완성단계이며,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나아가는 과정적 기간으로서, 통일원리는 이 기간을 성장기간(成長期間)이라고 하여 소생기(蘇生期), 장성기(長成期), 완성기(完成期)의 3단계의 기간으로 구분하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성장과정인 장성기의 완성급 단계에서 타락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어받음에 있어서도 본연의 창조성의 2/3정도만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천재적(天才的)인 창조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본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고자 했던 창조성에 비하면 크게 못 미쳐 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피조물 중에서 타락한 것은 인간뿐이다. 만물은 타락하지 않고 모두 완성하여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각자의 차원에서 닮고 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또 생길 것이다. 즉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이 왜 영장(靈長)답지 않게 타락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그것은 만물이 원리 자체의 주관성 또는 자율성에 의해서만 성장하게 되어 있는데 대하여, 인간은 성장(成長)에 있어서 이 원리의 자율성(自律性), 주관성(主管性) 외에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4) 창조성(創造性)과 책임분담(責任分擔)

여기서 원리 자체의 자율성이란 유기체(有機體)의 생명력을 말하며, 주관성은 같은 생명력(生命力)의 환경에 대한 영향성을 말한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성장하는 것은 그 내부의 생명력 때문이며, 주관성은 그 나무(生命力)가 주위에 미치는 영향력(影響力)을 말한다. 그런데 인간의 성장의 경우에도 이 원리 자체의 자율성과 주관성이 작용(作用)한다. 그러나 인간에 있어서는 육신만이 자율성과 주관성에 의해서 성장한다. 그러나 인간의 영인체는 그렇지 않다. 영인체의 성장에는 다른 차원의 조건(條件)이 요구된다. 그것이 책임분담 즉 분담(分擔)책임의 완수인 것이다.

여기서 밝혀둘 것은 영인체(靈人體)의 성장이란 육신처럼 영인체의 신장이 커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영인체는 육신에 밀착(密着)되어 있기 때문에 육신의 성장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커지게 되어 있다. 여기의 영인체의 성장이란 영인체의 영성의 성숙과 인격의 향상을 뜻한다. 또한 심정 수준의 향상을 뜻한다. 요컨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마음 자세의 성장이 바로 영인체의 성장인 것이다.

이러한 영인체의 성장은 다만 책임분담의 완수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여기의 책임분담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견지(堅持 ; 굳건히 지키면서)하고 계명(誡命)을 준수(遵守)하는 가운데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아니하고 내적 외적으로 가해지는 수많은 시련을, 스스로의 판단(判斷)과 결정하(決定下)에 극복해 나아가면서, 사랑의 실천을 계속함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상황(狀況)에서, 육신의 부모마저 없는 여건하에 이같은 책임분담을 다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아담은 그 책임을 다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와 같은 책임분담을 다 하지 못하고 결국,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타락(墮落)하고 말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실패할 수도 있는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아담에게 메웠을까? 만물처럼 쉽게 성장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그것은 인간을 만물의 주관위(主管位)에 세우기 위해서였으며 만물에 대한 주관자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주관은 자기의 소유물(所有物)이나 자기가 창조한 것만을 주관하는 것이 원칙이며, 타인의 소유나 타인의 창조물은 주관(主管)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또한 아담은 만물보다 뒤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물의 소유자도 창조자도 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자신의 창조주(創造主)의 자격을 물려주어서 주관주(主管主)로 세우고 싶었기 때문에(창 1:28), 일정한 조건을 세우게 하여 그것으로 아담도 하나님의 우주 창조에 동참했다는 것으로 인정해 주려했다.

5) 인간의 완성과 책임분담(責任分擔)

그 조건(條件)은 아담이 자기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즉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아니하고 자기를 완성시키면, 그것으로써 우주를 창조한 것과 같은 자격(資格)으로 쳐주려 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로 볼 때, 인간 하나의 가치는 전체 우주의 가치와 같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우주(天宙)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이며, 소우주(小宇宙)이기 때문이요, 또 인간의 완성으로써만 우주 창조도 완성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태 16:26)고 하신 것도 그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아담이 스스로 자신을 완성시키면, 가치로 보아서 아담이 우주를 창조한 것과 동등한 입장에 서는 셈이 된다.

그런데 창조는 창조자(創造者) 자신의 자기 책임 하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책임 하에서였다. 마찬가지로 아담이 자신을 완성시키는 일(창조(創造))도 아담 자신의 책임분담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해와에게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메웠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100% 책임을 아담에게 메운 것은 아니다. 인간 성장의 대부분의 책임은 하나님이 지시고, 아담-해와에게는 극히 적은 부분의 5% 책임분담을 메워, 그 5%의 책임분담을 다하기만 하면 100% 책임 전체를 아담이 다 해낸 것으로 쳐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특혜에도 불구하고 아담-해와는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타락(墮落)하고 말았으며, 그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창조성을 온전히 이어받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즉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온전히 이어받았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되었을 것인가.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완성했더라면 먼저 하나님의 심정 즉 사랑을 통해서 기쁨을 얻으려는 정적(情的)인 충동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인 것처럼 인간은 사랑의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모든 주관활동(主管活動)이 심정을 터전으로 하는 사랑 중심의 활동이 되게 됨을 뜻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정치, 경제, 산업, 과학, 예술, 종교 등이 물질을 다루는 한에 있어서 모두 주관활동(主管活動)인데, 이러한 활동이 하나님으로부터 이어받은 창조성(創造性)을 터로 한 사랑의 주관활동으로 변모(變貌)하게 된다.

6) 본연(本然)의 창조성(創造性)과 문화활동

상기(上記)의 심정(心情)의 항목에서, 심정의 충동력을 동기로 하는 지적(知的), 정적(情的), 의적 활동(意的活動)의 총화가 문화(心情文化)라고 했는데, 여기의 지적 활동, 정적 활동, 의적 활동이 모두 물질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이기 때문에 이 문화활동도 따지고 보면 본연(本然)의 창조성에 의한 주관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화(文化)라는 관점에서 오늘의 세계를 바라볼 때, 세계문화는 급속히 몰락(沒落)되어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예술, 교육, 언론, 윤리, 도덕, 종교 등이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혼란의 와중(渦中)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 여기에서 획기적인 어떠한 방안이 세워지지 않는 한, 이 몰락해 가는 문화를 다시 구출한다는 것은 거의 절망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혹자는 다년간 철의 장막으로 가린 채 강력한 기반을 유지해 온 공산독재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와 대결하다가 오늘날 개방을 계기로 하여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 방식의 도입을 서두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고 자본주의의 경제체제와 과학기술의 우월성(優越性)을 자랑할는지 모르나, 그것은 근시안적 인식착오(認識錯誤)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적 모순에 의한 노사분규(勞使紛糾) 및 빈부(貧富)의 격차의 심화와 이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가치관의 붕괴현상과 사회적 범죄의 범람, 그리고 과학기술의 첨단화(尖端化)에 따르는 범죄기술의 첨단화, 산업의 발달에 따르는 공해의 증대 등은 자본주의의 고질적(痼疾的)인 병폐로서 미구에 반드시 자본주의를 쇠망시키는 요인이 될 줄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주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문화적 위기의 근본원인은 멀리 인류역사(人類歷史)의 시발에까지 소급(遡及)하여 거기서 찾아야 하며, 그것이 바로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心情)과 사랑을 온전히 이어받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고 이기주의(利己主義)가 팽배하게 된 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문화를 위기(危機)에서 구출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중심주의(中心主義), 이기주의(利己主義)를 청산하고 모든 창조활동, 주관활동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전개하는 것이다. 즉 세계의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행동하게 될 때, 오늘날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과학, 종교, 사상, 예술, 언론 등 여러 문화영역(文化領域)의 얽히고 설킨 난문제(難問題)들이 근본적으로 그리고 통일적으로 해결되어, 여기에 새로운 참된 평화의 문화가 꽃피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문화도 아니요, 자본주의문화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문화이니 그것이 바로 심정문화(心情文化), 사랑의 문화라고도 불리우는 중화문화(中和文化)인 것이다.

이상으로 하나님의 창조성에 관한 이론도 또한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창조성에 관한 설명을 마친다. 동시에 하나님의 신성(神性), 더 나아가서 원상(原相)의 내용에 관한 설명도 이것으로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