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이데거
1) 하이데거의 인간관(人間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99~1976)는 인간을 현존재(現存在)(Dasein)라고 규정했으나 근대 철학이 말한 인간 처럼 세계를 향해 서있는 자아(自我)로 보지는 않았다. 그것(現存在)은 현재(現在) 거기에 있는 개개의 인간의 존재(Sein)를 의미한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 있으면서 다른 존재자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관심을 가지고 자기의 주변을 살피고 타인(他人)에게 마음을 쓰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現存在)의 이와 같은 근본적인 존재방식(存在方式)을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In-der-Welt-Sein)라고 하였다. 세계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주사위처럼 세상 속에 던져져 있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이 지상에 태어나려고 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주사위처럼 이 세상에 던져져 있음을 깨닫게 됨을 뜻한다. 이러한 상태(狀態)를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 또는 사실성(事實性)(Faktizitat)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보통 일상생활에 있어서, 주위의 의견이나 사정에 자신을 맞추어 가는 동안에 자기의 주체성을 상실(喪失)하게 된다. 이것이 본래의 자기를 상실한 이른바 속인(俗人)(Das Man)의 입장이다.19) 속인(俗人)은 일상생활에서 잡담으로 소일하거나 호기심(好奇心)에 사로잡혀서 애매함속에 안주하고 있다. 이것을 현존재(現存在)의 퇴락(頹落; Verfallen)이라고 한다.
이유도 없이 세계 속에 던져져 있는 현존재는 불안(不安; Angst)속에 있으나 그 불안의 유래(由來)를 더듬어 보면 결국 죽음에의 불안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불안속에서 막연히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어차피 죽음에의 존재(存在)(Sein zum Tode)임을 적극적(積極的)으로 인정하고 진지하게 미래를 향하여 결의(決意)하고 살아갈 때, 본래의 자기를 지향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미래를 향하여 자기자신을 던지게 된다. 즉 자신의 미래를 기획(企劃)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투기(투기(投企); Entwurf)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존재(現存在)의 성질을 실존성(實存性; Existenz)이라고 한다.
이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자기를 던지는 것일까. 그것이 양심의 소리이다. 양심의 소리(Ruf)란 퇴락(頹落)한 자기에서 본래의 자기로 돌아갈 것을 바라는 내적인 호소이다. 하이데거는 양심의 소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소리는 틀림없이 세계속에서, 나와 함께 있는 타인(他人)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양심(良心)의 소리는 나의 속에서 그러면서도, 나를 넘은 곳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또 인간의 현존재(現存在)의 존재의 의미를 시간성(時間性; Zeitlichkeit) 에서 파악하기도 한다. 현존재(現存在)의 존재방식은 던진다는 면(앞으로 기획(企劃)한다는 면)에서 보면 자기(自己)에 앞서 있음(未來에 있음)이며 던져져 있다는 面(과거에 이미 던짐을 받았다는 면)에서 보면 이미 속에 있음(세계 속에 던져져 있음)이며 관심을 가지고 환경을 살피며 타인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面에서 보면 존재자(存在者)의 옆에 있음이다. 이들 세 가지 계기(契機)를 시간성에 비추어보면 각각 미래(未來; Zukunft), 기존(旣存)(과거(過去; Gewesenheit), 현재(現在; Gegenwart)에 해당한다.
인간은 세계에서 떠난, 고립(孤立)된 자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인수(引受)하면서 현재의 퇴락(頹落)에서 자기를 구제하기 위하여, 미래의 가능성을 향하여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시간성(時間性)에서 본 인간관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하이데거의 인간관(人間觀)
하이데거는, 인간은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이며, 본래의 자기를 상실한 속인(俗人)이며 그 특성은 불안(不安)이라 하였다. 그러나 왜 인간은 본래의 자기를 상실하였는가, 또 본래의 자기는 어떤 것인가를 그는 명백히 밝히지 않고 있다. 본래의 자기를 향하여 자신을 던진다고 하나 그 목표로 삼아야 할 인간상(像)이 불분명(不分明)하면, 똑 바로 본래의 자기로 향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가 없다. 그는 양심(良心)의 소리가 인간에게 본래의 자기로 돌아오도록 인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인간이 양심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며, 이 상식적인 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한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神)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결국 니체와 같이 본능적(本能的)인 생명에 따라 사느냐, 하이데거와 같이 양심(良心)에 따라 사느냐의 어느 한 쪽을 택할 수밖에 없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양심에 따라 사는 것만으로는 불충분(不充分)하다. 인간은 본심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양심은 각자가 선(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양심의 기준이 다르다. 따라서 양심에 따라 살 때 그것이 본래의 자기를 지향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아무도 확언(確言)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는 본심(本心)에 따라 살 때, 인간은 비로소 본래의 자기를 향하여 가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막연히 미래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미래를 향하여 결의(決意)할 때, 불안(不安)에서부터 구제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본래의 자기모습이 명백하지 않은데 어떻게 불안(不安)에서 구제될 수가 있을 것인가. 통일사상에서 보면 불안의 원인은 신(神)의 사랑에서 떠난 데에 있다. 따라서 인간은 신(神)께로 되돌아가서 신(神)의 심정(心情)을 체휼하여 심정적 존재가 될 때, 비로소 불안에서 해방되고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죽음도 결의(決意)된 죽음으로서 받아들일 때, 죽음에의 불안을 초월(超越)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을 해결했다고는 할 수 없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인간은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의 통일체, 즉 성상과 형상의 통일체이며, 육신을 토대로 하여 영인체가 성숙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지상의 육신생활을 통하여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면 성숙된 영인체(靈人體)는 육신의 死後, 영계에서 영원히 산다. 인간은 죽음에의 존재(存在)가 아니고 영생(永生)의 존재(存在)이다. 따라서 육신의 죽음은 곤충의 탈피(脫皮)에 해당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죽음의 불안은 죽음의 의의(意義)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또 자기의 미완성을 의식적(意識的)으로나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느끼는 데서 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또 인간(현존재(現存在))이 시간성을 가진다고 하였다. 즉 인간은 과거(過去)를 인수받고 현재의 퇴락(頹落)에서 떠나 미래를 향하여 투기(投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명백하지 않다. 통일원리(統一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아담과 해와의 타락이래(墮落以來) 혈통적으로 원죄(原罪)를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상이 범한 유전죄(遺傳罪)나, 인류나 민족이 공통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는 연대죄(連帶罪)를 짊어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죄(罪)를 청산하기 위한 조건(條件, 탕감조건)을 세우면서 본래의 자기와 본래의 세계를 복귀하는 과업을 사명으로서 부여(附與)받고 있는 것이다.
이 과업은 인간 1대(一代)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자자손손(子子孫孫) 바톤을 계승하면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과거의 조상들이 다하지 못하고 남겨놓은 탕감조건을 인수(引受)해서 현재의 내가 그것을 청산하고 또 미래의 자손에게 복귀(復歸)의 터전을 물려주는 것이다. 이것이 통일사상에서 바라본, 인간이 시간성을 가진다는 것에 대한 참된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