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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키에르케고르

1) 키에르케고르의 인간관(人間觀)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1855)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자문(自問)하고 인간은 정신(精神)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에 관한 하나의 관계이다.'8)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관계를 조정(措定)한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자기 이외의 제3자(第三者)가 아니면 안 된다. 그것을 곧 신(神)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본래적인 자기란 신(神) 앞에 서있는 자기(自己)이다.

그런데 본래 신(神)과 관계를 맺고 살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이 신(神)으로부터 떠나버렸다. 그 경위는 불안(不安)의 개념(槪念)이라는 책속에서 성서 창세기의 이야기를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처음에 아담은 평화와 안식의 상태에 있었으나 동시에 불안(Angst)한 상태에 있었다. 신(神)이 아담에게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안 된다고 알려주었을 때, 아담속에 자유의 가능성이 자각(自覺)되었으며 이 자유의 가능성이 아담을 불안(不安)에 빠뜨렸다. 그리고 아담이 자유의 심연(深淵)을 들여다 봄으로써 현기증(Schwindel)을 느껴 자기(自己)에게 집착(執着)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원죄(原罪)가 성립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자기자신(自己自身)에 대한 관계 속에 분열이 일어나 절망(絶望; Verzweifelung)에 떨어져 버렸다. 그런데 인간은 이 절망을 위로부터 자기를 내리 누르는 어떤 무엇인 것처럼 착각하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그 절망을 제거(除去)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으로는 결코 절망이 제거되지 않는다. 신앙에 의해서 신(神)과의 관계를 회복(回復)함으로써만 본래의 자기의 관계를 되찾을 수가 있고, 절망에서 피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공중(公衆)은 일절(一切)이며, 무(無)이다. 모든 세력중에서 가장 위험(危險)한 것, 그리고 가장 무의미한 것이다."9)라고 하면서 대중(大衆)의 무책임성과 양심(良心)이 없음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인간이 참다운 인간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비인간적(非人間的)인 대중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단독자로서 단지 홀로 신(神)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본래的인 자기에로 돌아가는 단계를 실존(實存)의 3단계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p. 265

첫째의 단계는 미적(美的) 실존(實存)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인간은 단지 직접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감성적(感性的)인 욕구(欲求)에 따라 기지(機智)를 가지고 살려고 하며, 이 단계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인생의 목적은 향락(享樂)이다. 이것은 에로스적 사랑을 추구하는 심미가(審美家), 유혹자(誘惑者)의 입장이다. 그러나 향락의 순간은 계속해서 반복되기 어려우며, 결국은 권태와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기서 인간은 좌절(좌절(挫折))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결단에 의해 다음의 단계로 옮아간다.

둘째의 단계는 윤리적(倫理的) 실존(實存)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인간은 양심(良心)을 선악(善惡)의 판단기준으로 삼고 살려고 한다. 즉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선량(善良)한 시민으로서 살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노력(努力)해도 전적으로 양심에 따라 살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다시 좌절하고 절망한다. 그리고 새로운 결단에 의해 다음의 단계로 넘어간다.

셋째의 단계는 종교적(宗敎的) 실존(實存)의 단계이다. 신앙을 가지고 신(神) 앞에 홀로 서는 단계이며, 이 단계에서 비로소 인간은 참다운 실존(實存)이 된다. 이 단계에 이르려면 비약(飛躍)이 필요하다. 그것은 지성(知性)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역설(逆說)(Paradox)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예컨대 인륜(人倫)에 반하는 신(神)의 명령에 복종하여 자식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신앙이나, 영원(永遠)한 신(神)이 유한(有限)한 시간(時間)속에서 수육(受肉, 육신을 쓰고)하여 인간(예수)이 되어 나타났다고 하는 비합리적(非合理的)인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을 그는 역설(逆說)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약을 통하여 비로소 신(神)과의 관계를 회복(回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인륜(人倫)에 반하는 신(神)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복종하여 자식 이삭을 제물로서 바치려고 한 행위를 키에르케고르는 종교적인 삶의 전형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神)을 중심으로 한 실존(實存), 즉 본래의 자기가 된 인간이 자기(自己)를 사랑하는 것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신(神)을 매개(媒介)로 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을 주고 받을 때, 그와 같은 사랑의 행위에 의해서 참된 사회가 성립(成立)될 수가 있다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키에르케고르의 인간관(人間觀)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신(神)에서 떠남으로써 자기자신(自己自身)에 관한 관계에 분열이 생겨서 불안과 절망에 빠졌다고 하였는데, 자기자신에 관한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그는 밝히지 않고 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이것은 마음과 몸 또는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관계라고 가상(假想)할 수 있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이 가상을 전제로 하고 그의 자기(自己) 자신에 관한 관계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그러면 이런 전제(前提)에서 볼 때, 자기 자신에 관한 관계에 분열(分裂)이 생겼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신(神)을 떠남으로써 마음과 몸이 분열된 것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본래적인 자기에 있어서는 신(神)을 중심으로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 타락으로 마음과 몸이 갈라졌음을 뜻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인간의 생심과 육심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회복하여 원만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함으로써 가능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단독자(單獨者)로서 신(神) 앞에 서게 될 때, 절대자(神)에 대하여 절대적인 관계에 선다고 하였다. 이 단독자는 통일사상에서의 인간본성의 개성체(個性體)에 해당하는 개념(槪念)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자가 왜 절대적인가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인간의 개성체(個性體)가 절대적인 것은 인간이 절대자인 하나님의 개별상(個別相)을 닮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키에르케고르의 관계성과 단독성은 통일사상의 마음과 몸의 통일적관계(統一的關係)와 개성체(個性體)의 개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이러한 이해(理解)는 인간본성(本性) 전체에 대한 이해는 아니다. 인간 본성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은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이다. 또 인간이 단독자로서 즉 개성체(個性體)로서 신(神) 앞에 선다고 보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파악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부부(夫婦)로서 신(神)앞에 설 때 비로소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된다. 인간은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조화체(調和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또 로고스적 존재이며 창조적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주체성(主體性)과 대상성(對象性)을 함께 구비한 격위적 존재이기도 하다. 단독자로서 홀로 신(神)앞에 선다는 그의 인간관은 진지(眞摯)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인간은 고독하고 쓸쓸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왜 신(神)으로부터 떠나게 되었을까. 그 원인이 명백해지지 않는 한 본래의 자기 즉 신(神)의 지음을 받은 대로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담이 자유의 가능성(可能性)에서 오는 불안 때문에 죄(罪)에 떨어졌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통일원리에 의하면 자유나 불안이 타락의 원인은 아니다. 인간 시조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천사장(天使長)의 유혹에 의하여 사랑의 방향성(方向性)을 잘못 잡았던 것이다. 즉 그들은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에 의해서 타락한 것이다.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탈선(脫線)하려고 할 때 그들의 본심의 자유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데 대한 불안감을 일으켰으며, 이 불안감은 오히려 그들이 탈선(脫線)하지 않도록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은 이 불안감을 누르고 그들로 하여금 타락(墮落)線을 넘게 하였다. 이 타락의 결과로 인류는 신(神)으로부터 떠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계명을 어긴 데에 대한 죄책감과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의 단절(斷切)로 인하여 불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타락의 문제가 올바르게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불안과 절망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신(神)의 사랑에 관한 개념도 막연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정(溫情)을 가지고 대상을 무한히 위해 주고자 하는 정적(情的) 충동인 심정으로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지상(地上)에 나타날 때에는 방향성(方向性)을 갖추고 나타난다. 즉 먼저 가정을 기반으로 하여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 형제의 사랑과 같은 분성적(分性的)인 사랑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다시 여러 방향으로 확대되어서 인류애(人類愛), 민족애(民族愛), 린인애(隣人愛, 이웃사랑), 동물(動物)에의 사랑, 자연에의 사랑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에는 구체적인 내용과 방향성이 있으며, 막연한 사랑을 신(神)의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본래의 모습을 회복(回復)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허위(虛僞)와 싸워서 신(神)에게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쳤다. 이것은 사회의 박해(迫害)와 조소를 참으면서 신(神)을 뵈려고 한 그 자신의 발걸음을 반영(反映)한 것이며, 진실한 신앙인의 모습을 갖도록 당시의 종교인(宗敎人)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려는 충고이기도 한 것으로서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그는 27세때 레기네 오르센과 약혼(約婚)하였으나 결혼으로 그녀를 불행(不幸)에 빠뜨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또 연애보다도 차원이 높은 이상적(理想的) 사랑을 실현해 보고자 일방적(一方的)으로 약혼을 파기(破棄)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게 되었지만 통일사상으로 볼 때 그는 무의식중에 인격(人格)을 완성한 터 위에서, 신(神)을 중심한 참다운 남녀(男女)의 사랑을 실현할 것을 원했다고 볼 수 있다. 본래의 인간상(像)을 찾아 나아가는 키에르케고르의 방향성(方向性)은 기본적으로 통일사상의 입장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