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동시성섭리(同時性攝理)의 법칙
과거의 역사에 있었던 일정한 섭리적 사건들이 시대마다 반복(反復)되어 나타나는 것을 동시성섭리(同時性攝理)의 법칙이라 한다. 동시성의 관계에 있는 섭리적 시대는 중심인물(中心人物), 사건(事件), 수리적 기간(數理的期間) 등에 있어서 흡사한 양상(樣相)을 나타낸다. 이것은 섭리역사에서 어떤 섭리적 중심인물이 그 책임분담을 다 하지 못했을 때 그 인물을 중심으로한 섭리의 한 시대는 끝나게 되고 일정한 기간을 경과한 후에 유사한 다른 인물이 세워져서 전시대의 섭리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같은 섭리역사(攝理役事)를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복귀섭리의 연장과 더불어 탕감조건이 점차로 가중되어 나타나므로, 완전히 전시대와 똑같이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차원을 높인 형태로 반복한다. 그 결과, 역사는 나선형(螺旋形)을 그리면서 발전하게 된다.
그러면 동시성섭리(同時性攝理)의 법칙은 어떻게 역사에 적용되었는가.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의 2000년간기간, 즉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는 가정을 중심으로 한 복귀섭리가 실패함으로써 메시아가 강림(降臨)할 수 없었으므로, 거기에 대한 동시성섭리로서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의 2000년동안 이스라엘민족(民族)을 중심으로 한 복귀섭리(복귀섭리시대)가 동시성섭리로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또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 2000년간 이스라엘민족(民族)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예수의 십자가형으로 또 실패했으므로, 예수님이후 오늘날까지 2000년간의 기독교를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 즉 복귀섭리연장시대가 다시 이에 대한 동시성섭리로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이후 예수까지의 2000년과 예수이후 오늘날까지의 2000년이 된다. 두 시대에 있어서의 동시성의 내용을 정리하면 그림 8-1과 같이 된다. 역사속에서 동시성(同時性)을 발견한 사람은 슈펭글러였다. 그는 모든 문화는 동일한 형식에 의하여 발전하게 되며, 따라서 두 문화사이에는 대응(對應)하는 유사(類似)한 사상(事象)이 나타나며, 대응(對應)하는 사상(事象)을 동시성(同時性)이라고 하였다.
| 복귀섭리시대 | 복귀섭리연장시대 |
|---|---|
| 애급 고역시대(400년) | 로마제국 박해시대(400년) |
| 사사(士師)시대(400년) |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400년) |
| 통일왕국시대(120년) | 기독 왕국시대(120년) |
| 남북왕조 분립시대(400년) | 동서왕조 분립시대(400년) |
| 유대민족 포로시대(70년) 유대민족 귀환시대(140년) |
교황 포로시대(70년) 교황 귀환시대(140년) |
| 메시아강림 준비시대(400년) 신앙의 쇄신, 그리스문명 |
메시아재강림 준비시대(400년) 종교개혁, 문예부흥(르네상스) |
슈펭글러와 거의 같은 때에 역사의 동시성을 발견한 사람이 토인비였다. 토인비는 투키디데스를 강의(講義)하면서, 고대 그리스 역사와 근대서양사가 동시대적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14년이라는 해가 옥스퍼드대학(大學)에서 고전(古典) 그리스사(史)를 가르치고 있던 나를 붙들었다.
1914년 8월, 기원전(紀元前) 5세기의 역사가(家) 투키디데스는 지금 내가 붙들린 것과 같은 경험(經驗)을 그는 이미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내 마음 가운데 떠오르게 되었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속해 있는 세계가 정치적으로 분할(分割)됨으로써 여러 국가간(國家間)에 발생한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대전쟁으로 지쳐 있었다. 투키디데스는 당시의 대전쟁이 당시의 세계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음을 예견(豫見)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의 경과는 그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證明)해 주었다. 나는 지금 고대 그리스사와 근대 서양사가 경험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동시대적이라는 것을 보았다. 이 두 개의 코스는 평행(平行)하고 있으며 이것들을 비교연구(比較硏究)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토인비는 고대 그리스역사와 근대 서양사를 동시성(同時性)으로 다루었는데, 통일사관에서 보면, 고대 그리스시대는 메시아강림준비시대(降臨準備時代)이며, 근대 서양사는 메시아재강림준비시대(再降臨準備時代)여서 다 함께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시대(準備時代)라는 점에 있어서 동시성의 본질적(本質的)인 의의(意義)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