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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야스퍼스

1) 야스퍼스의 인간관(人間觀)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에 있어서의 실존(實存)이란 개체로서의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깨달은 자아(自我)를 말한다. 그는 실존(實存)이란 결코 객관(客觀)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내가 그것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또 행동하는 근원(根源)이며…… 실존(實存)이란 자기자신에 관련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초월자(超越者)에 관계하는 것(그 무엇)이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사고방식(思考方式)이다.

그는 초월자(Transzendenz) 또는 포괄자(包括者; Das Umgreifende)를 아직 만나지 아니한 실존 즉 본래적 존재를 찾아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실존을 가능적 실존(mogliche Existenz)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가능적(可能的) 실존(實存)이며, 그러한 상황에 대처해 가면서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죽음(Tod), 고뇌(苦惱)(Leiden), 투쟁(鬪爭; Kampf), 부채(負債; Schuld) 등 우리들이 넘을 수도 없고 변경(變更)할 수도 없는 상황이 존재(存在)한다'라고 지적하고 이것을 한계상황(限界狀況)(Grenzsituation)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영원(永遠)히 사는 것을 원하지만 누구나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죽음은 자기의 존재의 부정이다. 또 인간에게는 육체적인 고통, 질병, 노쇠, 기아 등의 고뇌가 있다. 또 인간이 살아있는 한 투쟁은 피할 수 없으며, 자기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을 배척한다고 하는 빚(負債)을 지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계상황(限界狀況)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함으로써 절망하거나 좌절(挫折)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 이 좌절(挫折)을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결정된다. 한계상황을 도피하지 않고 좌절을 직시(直視)하며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그것을 수용(受容)할 때, 존재세계(世界存在)를 넘어서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그 무엇)이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 때까지 무의미(無意味)한 것으로 생각되던 자연의 배후에, 역사의 배후에, 철학의 배후에, 예술의 배후에 초월자 즉 신(神)이 있어서 우리들을 포옹(抱擁)하고,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음을 홀연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때 초월자는 직접적(直接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암호로써 나타난다. 초월자는 자연이나 역사, 철학이나 예술 등을 통하여 암호(暗號)로 나타나서 인간에게 말을 건네 오는 것이다. 그리고 한계 상황 속에서 좌절을 체험한 자가 그 암호를 풀 수가 있다. 이것을암호해독(暗號解讀)(Chiffredeutung)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하여 인간은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다만 혼자서 초월자를 향하여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참된 자기의 실존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을 만난 다음부터 인간은 타인과의 사귐(交際)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한다. 서로 대등(對等)한 입장에 서서 각자(各自)의 자립성(自立性)을 인정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본래 인간의 삶이며, 타인과의 교제를 통하여 실존(實存)이 완성되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절(一切)의 목적의 의미에 최종적인 근거를 주는 철학의 목적, 즉 존재(存在)를 내적으로 각지(覺知, 지각)하고 사랑을 개명(開明)하며 평안을 완성한다는 목적은 사귐에 있어서만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다." 실존(實存)의 사귐은 긴장(緊張)의 관계이며 사랑의 싸움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야스퍼스의 인간관(人間觀)

야스퍼스는, 인간은 보통 초월자(超越者)를 발견하지 못한 가능적실존(可能的實存)이지만 한계상황을 통과함으로써 초월자에 관계되는 실존(實存), 즉 본래의 자기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왜 인간은 보통, 가능적 실존으로서 초월자로부터 떨어지게 되었는가? 또 왜 인간은 한계상황을 통과할 때에 초월자를 만나게 되는가? 야스퍼스는 이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는 한, 본래의 자기는 무엇인가, 또 어떻게 해야 본래의 자기를 회복(回復)하는가 하는 것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통일원리(統一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창조목적을 완성하도록 지음받았다. 창조목적의 완성이란 삼대축복(三大祝福)의 완성, 즉 인격의 완성, 가정의 완성, 주관성의 완성을 뜻한다. 그런데 인간시조(人間始祖)인 아담과 해와는 성장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인격이 미완성한 채 타락했으며 비원리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부부(夫婦)가 되어 가지고 죄(罪)의 자녀를 번식(繁殖)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전인류(全人類)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비원리적인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는 것이, 본래적인 자기를 회복하는 길이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이 창조목적을 실현할 때 나타나게 되어 있다. 야스퍼스는 키에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자기자신(自己自身)에 관계하면서 초월자에 관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실존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통일사상으로 볼 때 3대축복(三大祝福)중의 제1축복(第一祝福)인 인격완성만을 다룬 입장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통일사상이 말하는 인간본성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에 해당한다. 야스퍼스는 타인과의 사귐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나, 이 사랑 역시 키에르케고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막연하다.

참된 사랑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온정(溫情)을 가지고 대상을 한없이 위해 주고자 하는 정적인 충동으로서, 이 사랑이 가정을 통하여 4대상(四對象)을 향하는 사랑(부모(父母)에 대한 子女의 사랑, 부부(夫婦)의 사랑, 子女에 대한 부모(父母)의 사랑, 자녀 상호간의 사랑)으로서 분성적으로 나타난다. 이 4대상(四對象)에의 사랑을 기본으로 할 때 타인과의 교제에 있어서의 사랑이 원만해지게 된다. 야스퍼스는 실존(實存)의 사귐은 긴장(緊張)의 관계이고 사랑의 싸움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사랑의 본질은 기쁨이다. 따라서 본래의 사랑은 긴장이나 싸움으로 표현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다음의 문제는 왜 한계상황을 통과함으로써 인간이 초월자를 만날 수 있게 되는가라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인간이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좌절을 직시(直視)하고 성실히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만난다고 했다. 그러나 한계상황에 직면(直面)하여 좌절을 성실하게 받아들인 사람 중에는, 니체와 같이 신(神)으로부터 더욱 멀어진 사람도 있고, 키에르케고르처럼 신(神)에게 더욱 가까워진 사람도 있다. 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이유가 야스퍼스의 철학에서는 명백하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버렸으며 악(惡)의 주체인 사탄의 주관하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무조건(無條件)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속죄(贖罪)의 조건-탕감(蕩減)조건(條件)-을 세우고서만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야스퍼스의 한계상황(限界狀況)에서의 절망과 좌절은 탕감조건에 해당하는 것이며 그 조건을 뜻 맞게 세움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한계상황에 있어서 고통(苦痛)을 견디어 내면서도 救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마태 7:7)라고 한 것같이 자기중심을 버리고 절대적인 주체(하나님)를 찾으려고 하는 대상의식(對象意識)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自己)중심적(中心的)인 주체의식만을 가지고 있거나, 원념(怨念, 원한)이나 복수심을 품고 있는 한, 아무리 한계상황을 통과해도 신(神)을 만날 수는 없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좌절의 암호(暗號)를 해독함으로써 인간은 초월자를 만난다고 하였으나, 암호해독(暗號解讀)으로 알려진 신(神)은 상징적인 신(神)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만으로는 신(神)의 참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신(神)의 창조목적과 인간타락(墮落)의 사실을 알고,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3대축복(三大祝福)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체휼할 수가 있고 참다운 실존(본연의 자아(自我))이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