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르트르
1) 사르트르의 인간관(人間觀)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만일 하나님이 존재(存在)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신(神)의 실존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출발했다. 하이데거는 신(神)이 없는 실존을 주장했지만 사르트르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신(神)을 부정하는 실존(實存)을 말하였다. 그는 이 사실을 실존(實存)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로써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실존(實存)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은 인간은 우선 존재하고 세계 속에서 만나고, 세계 내에 별안간 모습을 나타내고 그 후에 정의(定義)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실존주의자(實存主義者)가 생각하는 인간이 정의(定義) 불가능한 것은, 인간이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후에 이르러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인간은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의 본성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그의 본성(本性)을 생각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구(道具)는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그 제작자(製作者)에 의해서 그 용도(用途)나 목적, 즉 본질이 결정된다. 따라서 본질이 존재에 선행(先行)한다. 마찬가지로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고, 하나님의 관념(觀念)에 따라 인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인간에 있어서도 본질이 존재(存在)에 선행(先行)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르트르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본질에서가 아니라 無에서 출현한 것이다.
다음에 그는 실존(實存)은 주체성(主體性)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은 無에서 출현한 우연적존재(偶然的存在)이며 누구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방식(存在方式)을 계획(計劃)하고, 자신을 선택(選擇)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주체성의 의미이다. 즉 공산당원(共産黨員)이 되거나 기독교도가 되거나 결혼을 하거나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이와 같은 실존(實存)의 근본적 성격을 불안(不安)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을 선택하나 그것은 동시에 각인(各人)은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전인류(全人類)를 선택한다"22)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자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전인류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을 뜻하며 여기에 우리들의 불안(不安)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안(不安)은 행동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행동의 조건(條件) 그 자체이며, 행동 그 자체의 일부라고 한다.
인간은 또 자유로운 존재이다. 실존(實存)이 본질에 앞서는 인간은 무엇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으며, 어떠한 일도 허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롭다는 것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일체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뜻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 무거운 짐이며, 인간은 자유로워지도록 저주받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자유이다.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다. 만일 한편에 있어서 하나님이 존재(存在)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正當化)하는 가치나 명령을 눈앞에서 발견할 수가 없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배후에도, 또 전방(前方)에도, 명백한 가치의 영역(領域)에 정당화를 위한 이유도, 핑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들은 핑계도 없어 고독(孤獨)하다. 그것을 나는 인간이 자유의 刑에 처해져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인간이 주체성(主體性)이라고 하면 인간은 그 주체성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주관받아야 할 대상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존재에는 즉자존재(卽自存在)(etre-en-soi)〕와 대자존재(對自存在)(etre-pour-soi)가 있다. 즉자존재(卽自存在)는 그 자체로서 있는 만물이며, 대자존재(對自存在)는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이 주체성을 발휘함에 있어서 즉자존재(卽自存在)(만물)를 대상으로 할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대자존재(對自存在)(인간)를 대상으로 할 때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주체성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타인(他人)도 또한 주체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고 있을 때, 그 인간존재(存在)를 대타존재(對他存在)'(etre-pour-autrui) 즉 다른 사람을 대하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 대타존재(對他存在)의 근본적구조(상호관계)는 視線을 보내는 者가 되거나 시선을 받는 者가 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나의 대상이거나 내가 다른 사람의 대상이거나 하는 관계이다.25) 즉 인간관계는 끊임없는 상극관계(相剋關係)가 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존재는 타인(他人)을 초월하거나 혹은 타인(他人)에 의해 초월되거나 하는 이 딜레마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하려 해도 소용이 없다. 의식개체(意識個體)의 상호간의 관계의 본질은 공동(共同) 존재(存在)(Mitsein)가 아니고, 상극(相剋; conflict)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사르트르의 인간관(人間觀)
사르트르는 인간에 있어서 실존(實存)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하고, 인간은 자신을 만든다고 하였다. 하이데거도 마찬가지로 인간은 미래를 향하여 투기(投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나 그의 경우에 있어서의 양심(良心)의 소리는 막연하지만 인간을 본래의 자기에게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경우에 있어서 본래의 자기라는 것은 완전히 부정되어 버린다. 이것은 신(神)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린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만일 사르트르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에 있어서 선악(善惡)의 기준은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자기의 책임으로 결단했다면 그것만으로 합리화(合理化)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사회는 윤리부재(倫理不在)의 사회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르트르는 또 인간은 주체성(主體性)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인간은 주체성인 동시에 대상성(對象性)이다라는 것, 즉 인간의 본성은 주체격위(主體格位)인 동시에 대상격위(對象格位)라는 것을 주장한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주체성이란 자유로이 자기를 선택한다는 것을 말하며 또 다른 사람을 대상화(對象化)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통일사상이 말하는 주체성은 사랑으로써 대상을 주관하는 능력을 말한다. 참다운 주체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먼저 대상성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먼저 대상격위에 서있으면서 대상의식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대상격위의 단계를 거쳐서 성장 또는 승진하여 드디어 주체격위에 서서 주체성(主體性)을 발휘하게 된다. 또한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주체성과 주체성의 상극의 관계 혹은 자유와 자유의 상극의 관계이다. 이것은 홉스의 만인(萬人)의 만인(萬人)에 대한 투쟁(鬪爭)에 통하는 사상으로서 분명히 잘못된 주체관이며 잘못된 자유관이다. 이러한 주체관이나 자유관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민주주의(民主主義)사회(社會)의 혼란을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은 주체성과 대상성의 양면(兩面)을 갖추어야 하며, 동시에 그 양면(兩面)의 기능이 원만한 수수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때에 비로소 평화의 세계가 실현되는 것이다.
또한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보면 자유란 저주받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원리(原理)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으며, 원리(原理)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규범(規範)인 것이다. 따라서 참된 자유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자유인 동시에 규범 안에서의 자유이다. 규범을 떠난 자유는 실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放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