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북마크
    아직 북마크가 없습니다.

(1) 칸트

1) 칸트의 윤리관

칸트(I. Kant, 1724~1804)는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批判)』에서 참다운 도덕률은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라라는 가언명법(假言命法; hypothetischer Imperativ)이어서는 안되며, 무조건적으로 무엇 무엇을 하라라는 정언명법(定言命法; kategorisher Imperativ)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훌륭한 사람으로 불려지기 위해서는 정직(正直)하라라는 조건부의 명법(命法)이 아니라, 정직(正直)하라라고 하는 무조건적인 명법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정언명법(定言命法)은 실천(實踐)이성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다. 이 실천이성이 우리들의 의지에 명령하는 것이다(이와 같은 실천(實踐)이성을 입법자(立法者)라고 한다). 이 실천(實踐)이성의 명령을 받은 의지가 선의지(善意志)이다. 그리고 이 선의지가 행동을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칸트는 도덕의 근본법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즉 네 의지의 격율(格率)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가 그것이다.3) 여기서 격률(格率; Maxime)이란 개개인이 주관적으로 정하는 실천의 원칙(原則)을 말하는 것으로서 칸트에 의하면, 그와 같은 주관적인 원칙(즉 格率)이 보편성을 띤 것이 되도독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칸트는 마치 자연법칙과 같이 모순(矛盾)이 없는 보편타당한 것을 선(善)으로, 그렇지 않는 것을 악(惡)으로 규정했다.

칸트는 인간 안에 있는 도덕률은 의무(義務)의 소리로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의무(義務)여, 네 숭고하고 위대한 이름이여, 이 이름을 띤 너는 아첨하며 여러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아무도 갖고 있지 않는데도 오로지 복종(服從)을 요구한다. ...... 자연히 사람의 마음에 들어와서 싫어도 정의를 획득(獲得)할 수 있는 법칙을 세우는 것뿐이다.'4)와 같이 칸트가 주장한 도덕은 의무(義務)의 도덕이었다.

또 칸트는 선의지(善意志)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유가 요청되지 않으면 안되며, 불완전한 인간이 선(善)을 완전히 실현코자 하는 한 영혼의 불멸(不滅)이 요청되지 않으면 안 되며, 또 완전한 선(善) 즉 최고선을 추구할 때, 그것이 행복과의 일치가 가능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요청해야 한다고 했다. 이리하여 칸트는 영혼(靈魂)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를 실천(實踐)이성의 요청(Postulat)으로서 인정하였다.

2) 통일사상에서 본 칸트의 윤리관

칸트는 純粹理性(이론이성)과 실천(實踐)이성을 구별했다. 순수이성이란 인식을 위한 이성이며, 실천이성이란 의지를 규정하고 행위를 인도하는 이성이다. 칸트에 있어서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정언명법(定言命法)에 의한 행위가 왜 선(善)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행위가 선(善)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할 경우, 그 행위의 결과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트는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무엇 무엇을 하라'라는 정언명법(定言命法)에 따른 행위라야 선(善)이라고 하였다.

가령 A라는 사람이 노상(路上)에서 육신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B라는 사람을 만나 `B를 도우라'는 내부로 부터의 정언명법(定言命法)에 의하여 A는 그 B를 병원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 B는 남에게 신세지기를 원치 않는 사람일 경우도 있으며, 따라서 B는 그 도움을 사양하고 단독으로 병원에 가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움을 주고자 하는 A는 실천(實踐)이성이 내린 정언명법(定言命法)에 의해서 행동하고 있으므로 그것으로써 만족할 것이다. 즉 A의 행동은 A에게는 무조건 선(善)이 되겠지만, B에게는 달갑지 않은 친절이 되어서 선(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동기만 좋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 칸트의 입장이어서, 상식적인 선(善)의 개념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칸트가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즉 인식과 실천을 분리했기 때문에 생긴 아포리아(難点)이다. 사실상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은 둘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다. 이성은 하나이며, 그 하나의 이성에 따라서 결과를 확인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실제의 실천인 것이다.

또 칸트의 도덕률(道德律)에 있어서 주관적인 격률(格率)을 보편화시키는 경우 그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보편화가 가능한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또 칸트는,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도덕적인 인간이 되면 그것으로 행복이 실현될 것이라고 말하고, 또 한편으로는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는 가언적(假言的)이므로 선(善)이라고 할 수 없다고도 하였다. 인간이 행복을 희구(希求)하고 있음을 알면서 행복을 목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요청(要請)하여 완전히 선(善)을 행하면 그 상태가 행복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칸트의 여러 문제점들은 모두 그가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모르는데 기인(基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목적이라면 무조건 자애적(自愛的), 이기적(利己的)인 것으로만 생각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창조목적에는 전체(全體)목적과 개체(個體)목적이 있고, 인간은 전체목적을 앞세우면서 개체목적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목적이라면 모두 개체목적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모든 목적을 否定해 버렸고, 그의 도덕률(道德律)은 그 기준이 애매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편으로, 칸트는 도덕률(道德律)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영혼(靈魂)의 불멸과 하나님의 존재가 요청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신(神)이나 영혼(靈魂)은 감각적 내용이 없으므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이들을 배제(排除)해 버렸다. 여기에도 칸트철학(哲學)의 아포리아가 있다. 칸트는 하나님을 요청(要請)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가정적(假定的)인 신(神)일 뿐, 참다운 신(神)이거나 실존(實存)하는 신(神)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神)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칸트는 실천(實踐)이성에 근거하는 의무감만을 선(善)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의무 그 자체는 차가운 것이다. 따라서 칸트가 말한 선(善)의 세계는 차가운 의무의 세계, 냉랭한 규율만을 지켜야 하는 병영(兵營)과 같은 세계인 것이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의무나 규율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목적은 참된 사랑의 실현에 있으며, 의무나 규율은 참사랑의 실현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