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에 대한 비판
문학은 당(黨)의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레닌의 말, 작가는 인간정신의 기사(技師)라는 스탈린의 말, 작가는 사회주의의 조산부(助産婦)요, 자본주의의 무덤파기꾼이다라는 고르키의 말처럼 예술가나 작가에게는 당(黨)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것만이 요구되며, 예술가나 작가의 개성(個性)이나 자유는 완전히 무시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혁명 이후 공산주의체제가 무너지기까지 소련의 예술가, 작가들은 감시와 억압속에서 살아 왔다. 그리고 특히 스탈린이 사회주의리얼리즘을 추진(推進)한 1930년대의 후반에는 많은 예술가, 작가들이 이단(異端)의 이름으로 체포(逮捕)되고 숙청(肅淸)되었던 것이다.26) 스탈린의 사후(死後)에도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상당한 기간 동안 예술이론으로서 군림(君臨)해 왔지만, 그러는 동안에 많은 예술가, 작가들이 반체제(反體制)로 돌아서게 되었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을 비판한 미술평론가(美術評論家) 리드는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지적(知的) 또는 독단적인 목적을 예술에 쓸데없이 억지로 밀어 넣으려는 기획(企劃)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27)
스탈린상(賞)을 수상(受賞)했다가 나중에 스탈린 비판자로 돌아섰던 소련의 작가 이리아 에렌부르그(I. Ehrenburg, 1891~1967)는 방직공장(紡績工場)의 여직공을 그린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기계이며 인간의 감정(感情)이 아니라 생산과정에 불과하다'28)라고 하면서 사회주의리얼리즘에서 그려지는 인간상(像)을 혹평했던 것이다. 예술평론가 조요한(趙要翰)도 사회주의리얼리즘에 있어서의 인간상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들(소련(蘇聯)의 작가... 필자)이 묘사한 농민과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일말(一抹)의 불안(不安)도 엿볼 수 없는 희한한 주인공(主人公)들이었다. 그것은 무갈등(non-conflict)의 이론이 유포(流布)되면서 더욱 그러하였다. 즉 인간적인 깊은 고민(苦悶)과 관련이 없는 것같이 보이는, 자기의 독특한 생활이 없는 주인공들이다. 그러니 거기에 인간의 내적세계(世界)가 표현될 리가 만무하다.
1986년 4월, 소련 우크라이나공화국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그것과 관련하여 고르바초프는, 체르노빌원전(原電)의 참사(慘事) 원인이 소련의 관료주의에 책임이 있음을 확인하고 비극이다. 참사도 문제였지만 우리 사회에 관료주의가 이처럼 뿌리깊게 박혀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더욱 슬픈 일이다라고 개탄하였으며, 당(黨)과 정부(政府) 차원에서 시도했다가 실패한 관료주의의 청산(淸算) 노력을 작가들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6월말(1986)의 제8차 소련 작가동맹전국대회에 즈음하여 관리(官吏)의 위선을 풍자한 고르키의 본을 받아서 여러 작가들은 관리에 대해서 더욱 비판적인 글을 써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일부 작가들은 그렇다면 문학작품의 사전 검열을 폐지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소련의 예술가, 작가들은 오랫동안 사회주의리얼리즘이라는 이름아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직전에 백가쟁명정책(百家爭鳴政策)의 일환으로 한 때 문화인들에게 자유가 주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대부분의 문화인들은 사회주의정책을 비판했던 것이다. 그 후 등소평이 집권한 후 실용주의(實用主義)를 채택하여 문화인들에게 자유를 조금씩 허락해 주었더니, 중공의 저명한 이론가 王若水는 사회주의에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소외(疎外)가 있음을 폭로하였다.
이상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한 예술, 그리고 당(黨)의 방침에 순응(順應)해야 하는 예술로서의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완전히 거짓된 예술임을 알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