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체격위(主體格位)와 대상(對象)
주체격위는 대상을 주관하는 위치이다. 본래 인간이 성장하여 완성하면 만물에 대해서 주체의 위치 즉 주체격위에 서게 된다. 즉 만물을 주관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런데 여기의 주체격위는 인간 대 인간관계(關係)에 있어서의 주체의 위치를 말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인간생활에 있어서 주체의 예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에 대하여 주체이며, 학교에서 교사는 학생에 대하여 주체이다. 사회(社會)에서 상사(上司)는 부하(部下)에 대하여 주체(主體)이며, 국가에서 정부(政府)는 국민(國民)에 대하여 주체이다. 또 전체는 개인에 대하여 주체이다.
그런데 주체가 대상을 주관하는데 있어서도 일정(一定)한 심적태도(心的態度)가 요구된다. 이것이 주체의식이다. 그것은 첫째로, 대상에 대해서 부단한 관심을 갖는 일이다. 그 동안 인간 소외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제기되어 왔는데, 그것은 여러 주체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말단(末端)의 대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데에 기인한 것이다. 대상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주체가 그 대상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대상은 주체에게 불신(不信)을 품게 되고, 그 주체를 따르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주체는 주관의 대상에 대하여 망각지대(忘却地帶)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주체는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상관이 부하(部下)에게 명령하거나 대상을 지배하는 것이 주체의식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참주관(主管)은 대상을 능동적(能動的)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행복(幸福)과 이상(理想), 기쁨과 생명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주체(主體)가 대상(對象)을 사랑할 때 대상은 주체에게 충성하고 복종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대상인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주체는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셋째로, 주체는 적당한 권위(權威)를 지녀야 한다. 주체가 사랑을 가지고 부하를 주관(統率)할 때, 일정한 권위가 없이 동정심(同情心)만 베푼다면 부하는 믿음직한 상관(上官)이라는 이미지가 흐려짐과 동시에 긴장감(緊張感)이 풀어져서 일하고자 하는 의욕이 저하된다. 따라서 주체는 적당한 권위를 지니면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에는 봄날과 같은 따뜻한 사랑도 있으나 겨울의 차가움과 같은 엄격(嚴格)한 사랑도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은 권위(權威)를 갖춘 엄격한 사랑은 대상들의 주체에 대한 신뢰도(信賴度)와 소속감을 제고(提高)시키며, 상관(上官)에의 복종심과 일에 대한 의욕(意欲)을 앙양시킨다. 여기의 권위를 갖춘 엄격한 사랑이란 사랑을 내포(內包)한 엄격한 명령(命令)을 말한다.
이와 같이 주체에게는 일정한 권위가 필요하나, 과다한 권위의식은 도리어 금물이다. 그런 권위에는 사랑이 깃들 수 없기 때문이다. 권위가 지나치게 강하게 작용하면 부하는 위축되어 창조성(創造性)을 발휘하기가 어렵게 된다. 상사가 부하를 꾸짖어도 부하가 감사함을 느끼면서 그 질책(叱責)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권위가 참권위(權威)이며, 바로 사랑을 내포한 권위(權威)인 것이다.
하나님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권위의 하나님이시다. 예컨대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비둘기와 양과 암소의 헌제에 실패하였을 때, 그의 자식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이 그 명령에 순종(順從)하여 이삭을 헌제로 바치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아노라.”고 하셨다. 이것은 이때까지 너는 내가 두려운 권위의 하나님인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네 아들을 제물로 바치도록 한 것이다라는 뜻이 내포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해서, 안이(安易)하게 생각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며 도리어 두렵게 여기는 것을 원(願)하고 계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권위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물에 대한 인간의 주체격위(主體格位)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랑은 심정(心情)을 터로 하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이 완성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相續)받으면, 심정을 터로 한 하나님의 창조성을 발휘(發揮)하여 만물을 주관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사랑(참사랑)을 가지고 만물을 주관(主管)하게 된다. 그 때, 인간은 참된 의미에서 만물에 대한 주체격위에 서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마르크스主義는 생산수단(生産手段)을 국유화(國有化)하고 계획경제를 실시하게 되면, 인간은 자연에 대한 참다운 의식적(意識的)인 주인이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主義)는 인간이 계획경제를 실시함으로써 만물주관의 주체격위(主體格位)에 서게 된다고 보고 있음을 뜻한다. 사랑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제의 개혁(계획경제의 실시)에 의해서 인간이 만물주관의 격위(格位)에 서게 된다는 뜻이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소련(蘇聯)이나 중국(中國) 등에서 경제정책이 실패하고, 생산성의 정체(停滯) 등으로 경제가 파탄된 것은 공산주의가 만물주관에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主義의 물질주의적(物質主義的) 인간관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물질적인 인간은 만물에 대해서 참다운 주체격위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